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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덕여왕 때인 7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전해지는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 또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별을 보는 데에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으로 미식적인 의미가 컸습니다. 또 하나는 역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하여 별이나 일월오성(해와 달, 금성·목성·수성·화성·토성의 다섯 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천문학 또는 역학입니다. 이 두 가지 관측의 비중은 시대가 지날수록 후자 쪽이 강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첨성대의 역사적 변천
고구려 시대의 첨성대에 대하여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평양성 안에 9묘와 9지가 있는데... 그 못가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양의 첨성대 옛터가 평양부 남쪽 3리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고구려의 첨성대를 말하는 것인데 현재는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신라의 첨성대는 경주에 실물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삼국유사],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등 많은 문헌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선덕여왕 때에 축조된 것으로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모양이며, 높이는 19척 5촌, 위의 원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원둘레가 35척 7촌이며, 중간 이상이 위로 뚫려서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별을 관측하였다는 기록이 현재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백제와 고려시대는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지만, 고려시대는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의 기록과 터, 그리고 개성 만월대 서쪽에 첨성대라고 구전되는 석조물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20년에 첨성대를 세우고, 그 뒤에 다시 경복궁 안의 관상감에서 장영실과 이천 등이 간의라는 천문기기를 10여종이나 만들어서 설치하고 관측하였습니다. 이 관상감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더불어 불타 없어지자, 1688년 숙종 14년에 새로운 터를 잡아 관상감을 재건하였고, 이것이 곧 창덕궁 금호문 밖에 있는 관천대로서 현재까지 남아있습니다. 첨성대는 처음에는 점성대라고 불려서 다분히 점성적이었던 것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영대라고도 하였다가 다시 관천대, 즉 더 정확하게는 간의대, 소간의대라고 하는 과학적인 명칭으로 변하여 왔습니다.
첨성대의 세부적인 구조
첨성대는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입니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습니다. 30cm 높이의 돌 361개 반을 사용하여 상층부와 기단을 제외한 27단을 쌓아 올렸습니다.전체 돌의 개수는 총 401개입니다. 내부는 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19단에서 20단까지와 25단에서 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습니다. 27단 내부의 반원에는 판석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습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입니다. 꼭대기에는 정자석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추분·동지·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천문대의 미스테리
지난 100여년 동안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부터 이런 관점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격렬한 논쟁이 있었으며, 최근까지 수많은 이설들이 등장했습니다. 첨성대 천문대설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 구조가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천문 관측용으로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내세웁니다. 첨성대가 천문대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말하는 첨성대의 사용법은 이렇습니다. 별이 총총한 밤에 사다리 등을 이용해 첨성대 중간의 작은 입구로 들어가 내부에서 다시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비좁은 꼭대기에 관측기구들을 설치하고 별을 관찰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위험하고 복잡한 경로를 거쳐 비좁은 곳에 가서 별을 관측했을까요? 정말로 별을 관측할 요량이라면 굳이 속이 빈 내부 공간을 만들지 말고, 여러 층의 단을 쌓아 그 상부를 넓고 평평하게 만든 후 외부에 설치한 층계를 디디고 올라가 관측하는 것이 훨씬 용이하고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만일 그것이 일반적인 천문대로 기능했다면, 상부의 정자석 방위를 별 관측에 도움이 되도록 동서남북에 맞추는 것이 정상인데 이런 기본적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첨성대가 별이 아닌 태양과 관련되었다는 가설인 정렬설이 있습니다. 첨성대의 기능을 파악하려는 여러 가지 노력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상단에 놓인 정자석 두 모서리를 잇는 대각선 언저리로 동지 일출선 또는 하지 일몰선이 지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 이후 첨성대와 이의 건축을 명한 선덕여왕의 능을 잇는 선이 동지 일출선상에 정렬되어 있다는 측량 결과가 밝혀졌습니다. 이는 고고천문학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국의 스톤헨지나 고대 이집트의 카르나크 신전 등은 이렇게 지점 정렬이 된 건축물의 대표적 예입니다. 이는 고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동지 일출을 태양의 부활을 알리는 새해의 출발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첨성대가 이러한 지점 정렬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첨성대 건축에 천문학적 고려가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주요 증거가 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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